알프레드 드 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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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프레드 드 뮈세(Alfred de Musset)는 19세기 프랑스의 낭만주의 시인이자 극작가, 소설가이다. 파리에서 태어나 상류층 가문에서 자랐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1829년 첫 시집 『스페인과 이탈리아 이야기』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뮈세는 시, 희곡, 소설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특히 극작품은 낭만주의 연극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주요 작품으로 시 "5월의 밤", 희곡 "로렌자초", 소설 『세기의 아이의 고백』 등이 있으며, 조르주 상드와의 연애는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뮈세는 1857년 파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작품은 아르튀르 랭보 등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20세기 이후 재평가를 받으며 프랑스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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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드 뮈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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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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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알프레드 루이 샤를 드 뮤세-파테 |
출생일 | 1810년 12월 11일 |
출생지 | 파리, 프랑스 제1제국 |
사망일 | 1857년 5월 2일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제2제국 |
직업 | 시인, 극작가 |
사조 | 낭만주의 |
서명 | Signature of Alfred de Musset.jpg |
2. 생애
알프레드 드 뮈세는 파리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앙리 4세 리세에서 수학하며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였고, 여러 분야를 탐색한 끝에 문학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첫 시집 『Contes d'Espagne et d'Italie|스페인과 이탈리아 이야기프랑스어』를 발표하며 초기 낭만주의 작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1]
7월 왕정 시기에는 내무부 사서로 근무하며 자유주의적인 정치 성향을 보였고, 루이 필립 국왕의 가족과도 교류했다.[3] 그는 1840년 라인 위기 당시 프랑스의 입장을 옹호하는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뮈세의 삶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건 중 하나는 1833년부터 1835년까지 이어진 여성 작가 조르주 상드와의 열정적인 연애이다.[1][19] 이 경험은 그의 대표작인 자전적 소설 『La Confession d'un Enfant du Siècle|한 세기의 아이의 고백프랑스어』(1836)[1]과 시집 『Nuits|밤프랑스어』(1835-1837)[1] 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845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몇 차례의 실패 끝에 1852년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말년에는 알코올 의존증과 건강 문제로 고생했으며, 1857년 파리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하여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5][6]
2. 1. 유년 시절과 교육

뮈세는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상류층이었지만 가난했으며, 아버지는 정부의 여러 요직을 역임했지만 아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지는 않았다. 뮈세의 어머니 역시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사교계 여주인으로서 뮈세 저택에서 열었던 응접실 파티, 점심 및 저녁 식사 등은 어린 알프레드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2]
어린 시절 뮈세는 자신이 읽었던 옛 로맨스 이야기 속 장면들을 바탕으로 즉흥적으로 소극을 연기하며 일찍부터 재능을 보였다.[2] 이러한 일화들은 훗날 그의 형인 폴 드 뮈세가 동생의 전기에 상세히 기록하여 후세에 전해졌다.[2]
알프레드 드 뮈세는 9세에 앙리 4세 리세에 입학했으며, 17세 때인 1827년에는 콩쿠르 제네랄의 라틴어 에세이 부문에서 수상하며 학문적 성과를 보였다. 빅토르 위고의 처남인 폴 푸셰의 도움으로 그는 같은 해 샤를 노디에가 주최하던 아르세날 도서관의 문학 살롱 세낙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의학(해부에 대한 혐오감으로 포기), 법률,[1] 그림, 영어, 피아노 등 다양한 분야를 시도했으나, 결국 문학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첫 시집인 Contes d'Espagne et d'Italie|스페인과 이탈리아 이야기프랑스어(1829)[1]를 발표하며 초기 낭만주의 작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20세가 되었을 무렵, 그의 문학적 명성은 빠르게 높아졌지만, 동시에 그의 화려한 생활 방식과 기질로 인한 평판도 함께 따라다녔다.
2. 2. 문단 데뷔와 초기 활동
뮈세는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상류층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 못했으며, 아버지는 정부의 여러 요직을 거쳤지만 아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하지는 않았다. 어머니 역시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뮈세 저택에서 열린 응접실 파티 등을 주관하는 사교계 활동은 어린 알프레드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2] 어린 시절 뮈세는 옛 로맨스 이야기를 바탕으로 즉흥적인 소극을 연기하는 것을 즐기며 일찍부터 재능을 보였다.[2] 이러한 일화는 훗날 그의 형 폴 드 뮈세가 동생의 전기에 상세히 기록했다.[2]
알프레드 드 뮈세는 9살에 앙리 4세 리세에 입학했고, 1827년 17세의 나이로 콩쿠르 제네랄 라틴어 에세이 부문에서 수상했다. 빅토르 위고의 처남인 폴 푸셰의 도움으로 17세부터 샤를 노디에가 주관하는 아르세날 도서관의 문학 살롱 세낙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의학(해부에 대한 혐오감으로 포기), 법률,[1] 그림, 영어, 피아노 등 다양한 분야를 시도했으나, 결국 문학의 길을 선택했다. 1829년 첫 시집 『스페인과 이탈리아 이야기』(Contes d'Espagne et d'Italie|콩트 데스파뉴 에 디탈리프랑스어)[1]를 발표하며 초기 낭만주의 작가 중 한 명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 그는 문학적 명성과 함께 사교계에서의 화려한 행보로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830년, 희곡 「베네치아의 밤」 초연이 실패로 돌아가자 뮈세는 큰 충격을 받고 이후 주로 무대 상연보다는 읽히기 위한 희곡, 즉 독서극 집필에 몰두하게 된다. 그의 희곡은 초기 작품을 제외하면 대부분 산문 형식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7월 왕정 시기에는 내무부 사서로 일했다. 그는 자유주의적 정치 성향을 가졌으며, 루이 필립 국왕의 가족과도 교류했다.[3] 이 시기 그는 1840년 라인 위기 논쟁에 참여했다. 당시 내무부 장관이자 그의 상관이었던 아돌프 티에르는 나폴레옹 시대와 같이 라인강 좌안(프랑스의 "자연 국경"으로 여겨짐)이 프랑스 영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 측에서는 니콜라우스 베커의 시 『라인강 노래』(Rheinliedde) 등을 통해 "그들은 자유로운 독일의 라인강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Sie sollen ihn nicht haben, den freien, deutschen Rhein ...de)라며 반발했다. 이에 뮈세는 자신의 시 "우리는 가졌었다, 당신들의 독일 라인강을"(Nous l'avons eu, votre Rhin allemand|누 라봉 위, 보트르 랭 알망프랑스어)을 발표하며 티에르의 주장을 옹호했다.
1833년, 여성 작가 조르주 상드를 만나 열정적인 연애를 시작했다.[19] 이 관계는 1835년까지 이어졌으며,[1] 뮈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자전적 소설 『한 세기의 아이의 고백』(La Confession d'un Enfant du Siècle|라 콩페시옹 뒨 앙팡 뒤 시에클프랑스어, 1836)을 집필했다.[1] 이 소설은 1999년 영화 『한 세기의 아이들』(Les Enfants du Siècle프랑스어)과 2012년 영화 『한 세기의 아이의 고백』(Confession of a Child of the Century영어)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상드 또한 자신의 관점에서 이 관계를 소설 『그녀와 그』(Elle et lui|엘 에 뤼프랑스어, 1859)에서 다루었다. 뮈세의 시집 『밤』(Nuits|뉘프랑스어, 1835~1837)은 상드에 대한 그의 감정 변화를 초기 절망에서 최종 체념에 이르기까지 보여준다.[1] 같은 해(1833년), 그는 레즈비언 에로틱 소설로 알려진 『가미아니, 또는 두 밤의 과잉』(Gamiani, ou Deux Nuits d'Excès|가미아니, 우 되 뉘 덱세프랑스어)의 익명 저자로 추정되기도 하는데, 이 소설의 여주인공이 상드를 모델로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4]
상드와의 관계 외에도 그는 매춘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으며, 작가이자 사교계 여성인 셀레스트 드 샤브리양(라 모가도르로도 알려짐)을 폭행하고 모욕한 익명의 저자이자 고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 3. 조르주 상드와의 만남과 이별
1833년, 뮈세는 여섯 살 연상의 여성 작가 조르주 상드를 만나 열정적인 사랑을 시작했다.[19] 두 사람의 관계는 1833년부터 1835년까지 이어졌으며[1], 당대 사교계와 문단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이 격정적인 연애 경험은 뮈세의 작품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상드와의 만남과 이별 과정을 자신의 관점에서 자전적 소설 『세기의 아이의 고백』(''La Confession d'un Enfant du Siècle'', 1836)에 담아냈다.[1][19] 이 소설은 낭만주의 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후대에 여러 차례 영화화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99년 영화 『한 세기의 아이들』(''Children of the Century'')과 2012년 영화 『한 세기의 아이의 고백』(''Confession of a Child of the Century'')이 있다. 한편, 조르주 상드 역시 자신의 입장에서 이 관계를 회고하는 소설 『그녀와 그』(''Elle et lui'', 1859)를 발표했다.
뮈세의 대표적인 시집 『밤』(''Nuits'', 1835~1837) 역시 상드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감정의 격변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시집에 수록된 네 편의 시는 사랑의 초기 절망감부터 시작하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체념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1]
한편, 뮈세는 작자 미상으로 출판된 레즈비언 에로틱 소설인 『가미아니, 또는 두 밤의 과잉』(''Gamiani, or Two Nights of Excess'', 1833)의 실제 저자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이 조르주 상드를 모델로 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4]
2. 4. 후기 활동과 죽음

뮈세는 7월 왕정 시대에 내무부 사서로 일하며 자유주의적인 정치 성향을 보였고, 루이 필립 국왕의 가족과도 친분을 유지했다.[3] 1840년 라인 위기 당시, 그의 상관이었던 내무부 장관 아돌프 티에르는 프랑스가 라인강 좌안을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독일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자연 경계"라는 명분을 내세운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니콜라우스 베커의 『라인강 노래』(Rheinliedde)와 같이 "그들은 자유로운 독일 라인 강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Sie sollen ihn nicht haben, den freien, deutschen Rhein ...de)라는 내용을 담은 독일의 노래와 시로부터 강한 반발을 샀다. 뮈세는 이에 "우리는 당신의 독일 라인 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Nous l'avons eu, votre Rhin allemand프랑스어)라는 제목의 시로 응수하며 논쟁에 참여했다.
1845년 4월 24일, 뮈세는 오노레 드 발자크와 함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1848년 혁명 이후 들어선 공화 정부의 새로운 장관 알렉상드르 오귀스트 르드루 롤랭에 의해 사서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1848년과 1850년 두 차례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 선출에 실패했으나, 1852년에 마침내 선출되었다. 이후 1853년에는 공공 교육부의 사서로 다시 임명되었다.
알프레드 드 뮈세는 1857년 파리에서 잠을 자던 중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오랜 알코올 의존증과 대동맥판 부전증이 겹쳐 발생한 심부전이었다. 그의 형 폴 드 뮈세가 생전에 관찰했던 증상 중 하나는 맥박이 뛸 때마다 머리가 흔들리는 것이었는데, 이는 훗날 뮈세 징후로 알려지게 되었다.[5][6] 그는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작품 세계
알프레드 드 뮈세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시, 희곡, 소설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그의 작품은 당대의 주류 경향과는 차별화되는 개성을 보여주며, 섬세한 심리 묘사와 풍부한 시적 감수성이 두드러진다.
뮈세의 희곡은 초기 실패 이후 상연을 염두에 두지 않고 쓰인 경우가 많아 형식적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칠 수 있었다. 마리보의 전통을 계승한 정교한 심리 분석과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받은 극적인 구성, 화려한 문체가 특징이다. 그의 희곡들은 후대에 연극적 가치를 인정받아 무대에 올려졌다.
시 분야에서는 특히 조르주 상드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깊은 서정성을 담은 작품들이 유명하다. 사랑의 고뇌와 환희, 상실감 등을 노래한 그의 시는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으며, 〈초기시집〉과 〈신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소설 역시 그의 문학 세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대표작인 《세기아의 고백》은 자전적 요소와 함께 당대 젊은이들이 겪었던 '세기병'이라 불리는 시대적 불안과 방황을 심도 있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뮈세의 문학은 후대 예술가들에게도 지속적인 영감을 주었으며, 그의 희곡과 시는 여러 작곡가에 의해 오페라, 가곡, 기악곡 등으로 재창작되어 그의 문학적 영향력을 보여준다.
3. 1. 희곡
뮈세의 극작은 당대 연극 조류와 다른 길을 걸었는데, 이는 그의 작품 대부분이 실제 상연을 염두에 두지 않고 쓰였기 때문이다. 그의 첫 희곡인 <베니스의 밤>(La Nuit vénitienne프랑스어)은 1830년 오데온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나, 주연 배우의 실수 등이 겹치며 관객의 야유 속에 실패로 끝났다.그러나 뮈세는 극작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후 출판한 시집에 운문극 <술잔과 입술>(La Coupe et les lèvres프랑스어)과 <처녀는 무엇을 꿈꾸는가>(À quoi rêvent les jeunes filles프랑스어)를 수록하며 '안락의자에서 보는 연극'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이를 통해 자신만의 극작 방향을 확립한 그는, 이후 세계평론지(Revue des Deux Mondes)에 상연을 고려하지 않은 다수의 희곡을 발표했다. 1833년 앙드레아 델 사르토 (희곡)(Andrea del Sarto프랑스어)와 마리안의 변덕(Les Caprices de Marianne프랑스어), 1834년 판타지오 (희곡)(Fantasio프랑스어), 사랑을 장난으로 하지 말아라(On ne badine pas avec l'amour프랑스어), 로렌자치오(Lorenzaccio프랑스어), 1837년 <바람기>(Un Caprice프랑스어) 등이 대표적이며, 이 작품들은 이후 희곡집 <희극과 격언극>(Comédies et Proverbes프랑스어)에 수록되었다.
상연의 제약에서 벗어난 덕분에 뮈세의 희곡은 자유로운 형식과 풍부한 시적 감성을 담아낼 수 있었다. 동시에 마리보 풍의 섬세한 심리 묘사를 계승하여 프랑스 연극의 전통을 확장하고 깊이를 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사극 로렌자치오는 셰익스피어를 연상시키는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문체로 낭만주의 연극의 걸작으로 꼽힌다.
뮈세의 희곡은 1847년 배우 알랭 부인이 <바람기>를 성공적으로 상연하면서 그 연극적 가치를 재평가받기 시작했고, 이후 여러 작품이 무대에 올라 각광받았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연극에서 시적인 요소를 회복하고자 했던 자크 코포의 운동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가 더욱 깊이 이해받게 되었다.
=== 주요 희곡 목록 ===
=== 희곡을 원작으로 한 작품 ===
뮈세의 희곡은 후대 여러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다양한 음악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 오페라
-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자밀레(Djamileh프랑스어, 1871)는 뮈세의 이야기 ''나무나''(Namouna프랑스어)를 바탕으로 한다.[7]
- 자크 오펜바흐는 뮈세의 희곡을 바탕으로 오페라 코미크 판타지오(Fantasio프랑스어, 1872)를 작곡했다. 대본은 뮈세의 동생 폴 드 뮈세가 썼다.[8]
- 에텔 스미스 역시 같은 희곡을 바탕으로 오페라를 작곡하여 1898년 바이마르에서 초연했다.
-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에드가르(Edgarit, 1889)는 희곡 ''잔과 입술''(La Coupe et les lèvres프랑스어)에 기반한다.
- 앙드레 메사제의 4막 오페라 포르투니오(Fortunio프랑스어, 1907)는 뮈세의 희극 ''르 샹들리에''(Le Chandelier프랑스어)를 원작으로 한다.
- 메리 로셀리 니심의 오페라 ''안드레아 델 사르토''(Andrea del Sartoit, 1931)는 뮈세의 동명 희곡을 바탕으로 한다.[9]
- 앙리 소게의 2막 오페라 코미크 ''마리안의 변덕''(Les caprices de Marianne프랑스어, 1954)은 뮈세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다.[10]
- 다니엘-르쉬르의 오페라 ''안드레아 델 사르토''(Andrea del Sarto프랑스어, 1968) 역시 뮈세의 희곡 ''앙드레 델 사르토''(André del Sarto프랑스어)에 기반한다.
- 메디치 가문 시대 피렌체를 배경으로 한 ''로렌자치오''(Lorenzaccioit)는 1972년 작곡가 실바노 부소티에 의해 음악극으로 만들어졌다.
; 가곡 및 기악곡
- 조르주 비제는 뮈세의 시 "꽃에게"(À une fleur프랑스어)와 "쉬종에게 안녕"(Adieux à Suzon프랑스어)을 가곡으로 만들었다 (1866). 후자는 에마뉘엘 샤브리에가 1862년에 먼저 작곡했다.
- 폴린 비아르도는 뮈세의 시 "마드리드"(Madrid프랑스어)를 가곡으로 작곡했다 (1884).
- 웨일스 작곡가 모르피드 르윈 오웬은 뮈세의 "슬픔"(La Tristesse프랑스어)과 "포르투니오의 노래"(Chanson de Fortunio프랑스어)를 가곡으로 만들었다.
- 릴리 불랑제는 뮈세의 희곡 ''잔과 입술''의 일부 구절을 사용하여 남성 바리톤, 혼성 합창단, 오케스트라를 위한 ''한 병사의 장례식을 위하여''(Pour les funérailles d'un soldat프랑스어)를 작곡했다.
- 루제로 레온카발로의 교향시 ''5월의 밤''(Nuit de mai프랑스어, 1886)은 뮈세의 시를 바탕으로 한다.
- 마리오 카스텔누오보-테데스코의 피아노 독주곡 ''9월의 하늘''(Cielo di settembreit, Op. 1, 1910)은 뮈세의 시 "젊은 여성들이 무엇을 꿈꿀까"의 한 구절에서 제목을 따왔다.
- 레베카 클라크의 ''비올라 소나타''(1919)는 뮈세의 ''5월의 밤''(La Nuit de mai프랑스어)에서 두 구절을 서문으로 인용한다.[11]
3. 2. 시
뮈세의 시는 〈초기시집〉(1829-1835)과 〈신시집〉(1836-1852) 두 권의 시집에 주로 수록되어 있다. 특히 그의 시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4편의 〈밤〉(Nuits프랑스어) 연작시(1835-1837)인데, 이는 조르주 상드와의 고통스러운 연애 경험에서 비롯된 감정을 담아낸 뛰어난 서정시로 평가받는다. 이 시들은 〈5월의 밤〉(1835), 〈12월의 밤〉(1835), 〈8월의 밤〉(1836), 〈10월의 밤〉(1837)으로 구성되어 있다.상드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고뇌는 그의 장편소설 〈세기아(世紀兒)의 고백〉(La Confession d'un enfant du siècle프랑스어, 1836)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소설은 샤토브리앙의 〈르네〉 등에서 나타난 '세기병'(mal du siècle프랑스어), 즉 시대적 우울과 불안감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뮈세의 시는 후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으며, 특히 19세기와 20세기 초 여러 작곡가들이 그의 시를 바탕으로 음악 작품을 만들었다.
- '''오페라'''
- * 조르주 비제는 뮈세의 이야기 ''나무나''(Namouna프랑스어)를 바탕으로 루이 갈레의 대본을 사용해 오페라 ''자밀레''(1871)를 작곡했다.[7]
- * 오펜바흐는 뮈세의 1834년 희곡을 바탕으로 오페라 코믹 ''판타지오''(Fantasio프랑스어, 1872)를 작곡했으며, 대본은 뮈세의 형인 폴 드 뮈세가 썼다.[8]
- * 에텔 스미스 여사 역시 같은 희곡을 바탕으로 오페라를 작곡하여 1898년 바이마르에서 초연했다.
- *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에드가르''(1889)는 뮈세의 희곡 ''잔과 입술''(La Coupe et les lèvres프랑스어)을 기반으로 한다.
- * 앙드레 메사제의 4막 오페라 ''포르투니오''(Fortunio프랑스어)는 뮈세의 1835년 희극 ''촛대''(Le Chandelier프랑스어)를 바탕으로 한다.
- * 메리 로셀리 니심의 오페라 ''안드레아 델 사르토''(Andrea del Sartoit, 1931)는 안토니오 레가가 뮈세의 글을 바탕으로 쓴 대본을 사용했다.[9]
- * 앙리 소게의 2막 오페라 코믹 ''마리아네의 변덕''(Les Caprices de Marianne프랑스어, 1954)은 뮈세의 동명 희곡을 바탕으로 한다.[10]
- * 다니엘-르쉬르의 오페라 ''안드레아 델 사르토''(Andrea del Sarto프랑스어, 1968)는 뮈세의 희곡 ''안드레 델 사르토''를 기반으로 한다.
- *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를 배경으로 한 희곡 ''로렌차치오''(Lorenzaccio프랑스어)는 1972년 음악가 실바노 부소티에 의해 음악으로 만들어졌다.
- '''가곡'''
- * 조르주 비제는 1866년 뮈세의 시 À une fleur|아 윈 플뢰르프랑스어 (꽃에게)와 Adieux à Suzon|아디외 아 쉬종프랑스어 (쉬종에게 안녕)을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만들었다. 후자는 샤브리에가 1862년에 먼저 작곡하기도 했다.
- * 폴린 비아르도는 뮈세의 시 Madrid|마드리드프랑스어를 그녀의 6개의 멜로디(1884) 중 하나로 작곡했다.
- * 웨일스 작곡가 모르피드 르윈 오웬은 뮈세의 시 La Tristesse|라 트리스테스프랑스어 (슬픔)와 Chanson de Fortunio|샹송 드 포르투니오프랑스어 (포르투니오의 노래)를 가곡으로 만들었다.
- * 릴리 불랑제는 남성 바리톤, 혼성 합창단,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 Pour les funérailles d'un soldat|푸르 레 퓌네라이 당 솔다프랑스어 (병사의 장례를 위하여)에서 뮈세의 희곡 ''잔과 입술'' 4막의 여러 구절을 사용했다.
- '''기악곡'''
- * 루제로 레온카발로의 교향시 La Nuit de Mai|라 뉘 드 메프랑스어 (5월의 밤, 1886)는 뮈세의 동명 시를 바탕으로 한다.
- * 마리오 카스텔누오보-테데스코의 독주 피아노곡 Cielo di settembre|치엘로 디 세템브레it (9월의 하늘), 작품 1 (1910)은 뮈세의 시 À quoi rêvent les jeunes filles|아 쿠아 레브 레 죈 피유프랑스어 (젊은 아가씨들은 무엇을 꿈꾸는가)의 한 구절("Mais vois donc quel beau ciel de septembre…", 하지만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 9월의 하늘인가…)에서 제목을 따왔다.
- * 레베카 클라크의 ''비올라 소나타''(1919)는 뮈세의 ''5월의 밤'' 중 두 구절을 서문으로 인용하고 있다.[11]
다음은 뮈세의 주요 시 작품 목록이다.
연도 | 작품명 (원제) |
---|---|
1826 | 아가씨 르 두아랭에게 (À Mademoiselle Zoé le Douairin프랑스어) |
1828 | 꿈 (Un rêve프랑스어) |
1830 | 스페인과 이탈리아 이야기 (Contes dEspagne et dItalie프랑스어) - 처녀시집 |
1831 | 나무나 (Namouna프랑스어) |
1833 | 롤라 (Rolla프랑스어) |
1835 | 5월의 밤 (La Nuit de mai프랑스어) |
1835 | 12월의 밤 (La Nuit de décembre프랑스어) |
1836 | 8월의 밤 (La Nuit d'août프랑스어) |
1836 | 바베린의 노래 (Chanson de Barberine프랑스어) |
1837 | 10월의 밤 (La Nuit d'octobre프랑스어) |
1837 | 말리브란에게 (À la Malibran프랑스어) |
1838 | 하느님 안의 희망 (L'Espoir en Dieu프랑스어) |
1840 | 슬픔 (Tristesse프랑스어) |
1840 | 잃어버린 저녁 (Une Soirée perdue프랑스어) |
1841 | 추억 (Souvenir프랑스어) |
1842 | 나태에 관하여 (Sur la paresse프랑스어) |
1842 | 독서 후에 (Après une lecture프랑스어) |
1860 | 유작 (Œuvres posthumes프랑스어) - 사후 출판 |
뮈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 '''"얼마나 영광스럽고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 예외가 된다는 것은."'''[12]
- '''"인간은 제자이고, 고통은 그의 스승이다."'''[13]
- '''"진실은 나체다."'''[14]
3. 3. 소설
뮈세는 극작과 시뿐만 아니라 소설 분야에서도 중요한 작품을 남겼다. 그의 대표적인 장편소설로는 《세기아의 고백》(La Confession d'un enfant du siècle프랑스어, 1836)이 있다. 이 작품은 뮈세가 조르주 상드와의 고통스러운 연애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인 소설로 평가받는다. 작품 속에는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의 《르네》 등에서 나타나는 당시 젊은이들의 불안과 환멸감, 소위 '세기병'(mal du siècle프랑스어)이라 불리는 시대적 고뇌가 깊이 반영되어 있다.《세기아의 고백》 외에도 뮈세는 여러 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중편소설 《두 사람의 애인》(Les Deux Maîtresses프랑스어, 1837)과 《미미 팡송》(Mimi Pinson프랑스어, 1845)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10편이 넘는 소설 작품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소설들은 섬세한 심리 묘사와 서정적인 문체로 프랑스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4. 평가 및 영향
장 르누아르 감독의 영화 ''라 레글 뒤 쥐''(La Règle du jeu|라 레글 뒤 쥐프랑스어, 규칙의 게임)는 뮈세의 희곡 ''마리안느의 변덕''(Les Caprices de Marianne|레 카프리스 드 마리안프랑스어)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
또한, 장 아누이의 희곡 ''에우리디케''(Eurydice|에우리디스프랑스어, 1941)는 뮈세의 희곡 ''사랑으로 장난치지 마라''(On ne badine pas avec l'amour|옹 느 바딘 파 아베크 라무르프랑스어, 1834)의 제2막 5장에 나오는 "퍼디칸의 장황한 연설"을 중요한 모티프로 사용한다.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 뱅상과 에우리디케의 어머니는 과거 배우 시절 퍼디칸의 연설 장면을 연기했던 추억을 회상하며, 그 연설이 그들의 첫 분장실 로맨스를 촉발했던 영광스러운 날들을 떠올린다.
뮈세는 다음과 같은 명언들을 남기기도 했다.
- '''"얼마나 영광스럽고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 예외가 된다는 것은."'''[12]
- '''"인간은 제자이고, 고통은 그의 스승이다."'''[13]
- '''"진실은 나체다."'''[14]
4. 1. 비판적 시각

프랑스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는 뮈세의 작품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평가를 남겼다. 랭보는 그의 ''예언자의 편지''(Lettres du Voyant프랑스어)에서 뮈세가 환상을 마주했을 때 "눈을 감았기" 때문에 문학적으로 큰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고 지적했다(폴 드메니에게 보낸 편지, 1871년 5월).
한편, 뮈세의 작품은 사회적인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화가 앙리 즈르벡이 뮈세의 시를 바탕으로 그린 1878년 작품 ''롤라''는 당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그림은 시의 한 장면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성관계를 가진 후 나체로 드러난 매춘부를 묘사했다는 이유로 파리 살롱 심사위원회로부터 부도덕하다는 판정을 받고 전시가 거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은 오히려 즈르벡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5. 작품 목록
알프레드 드 뮈세는 시, 희곡, 소설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작품을 남겼다. 그의 주요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희곡초기 실패작인 La Nuit vénitienne|베니스의 밤fra(1830) 이후, 상연보다는 읽히기 위한 희곡들을 주로 발표했다. 대표작으로는 Les Caprices de Marianne|마리안느의 변덕프랑스어(1833), Lorenzaccio|로렌차초프랑스어(1834), 사랑을 장난으로 하지 말아라(1834) 등이 있으며, 이 작품들은 그의 사후에야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자세한 내용은 #희곡 섹션에서 다룬다. 이 외에도 하위 섹션에서 다루지 않는 희곡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La Quittance du diable|악마의 영수증fra (1830)
- La Coupe et les lèvres|잔과 입술fra (1831)
- À quoi rêvent les jeunes filles|젊은 아가씨들이 꿈꾸는 것fra (1832)
- La Quenouille de Barberine|바르베린의 방추fra (1835)
- Le Chandelier|촛대fra (1835)
- Il ne faut jurer de rien|아무것도 맹세해서는 안 된다fra (1836)
- Faire sans dire|말하지 않고 행하다fra (1836)
- Il faut qu'une porte soit ouverte ou fermée|문은 열리거나 닫혀야 한다fra (1845)
- L'Habit vert|녹색 외투fra (1849)
- Louison|루이존fra (1849)
- On ne saurait penser à tout|모든 것을 생각할 수는 없다fra (1849)
- L'Âne et le Ruisseau|당나귀와 개울fra (1855)
시뮈세의 첫 시집인 Contes d'Espagne et d'Italie|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이야기fra(1830)와 그의 서정성이 잘 드러나는 대표작 5월의 밤(1835) 등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시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소설조르주 상드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쓴 자전적 소설 `한 세기의 아이의 고백`(1836)이 유명하며, 이 외에도 여러 중편 및 단편 소설을 남겼다. 주요 소설 작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소설 및 #단편 소설 및 중편 소설 섹션에서 다룬다.
5. 1. 시
- Contes d'Espagne et d'Italie|콩트 데스파뉴 에 디탈리fra (1830년): 알프레드 드 뮈세의 첫 시집이다.
- 5월의 밤 (La Nuit de Mai|라 뉘 드 메fra, 1835년)
5. 2. 희곡
뮈세의 극작이 당대의 주류 경향과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작품이 처음부터 상연을 염두에 두지 않고 쓰여졌다는 점이다. 그의 첫 희곡인 <베니스의 밤>은 1830년 오데온 극장에서의 초연 당시 주연 배우의 실수 등이 겹치며 관객의 야유 속에 실패로 끝났다.그러나 뮈세는 극작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후 출판한 시집에 <술잔과 입술>, <처녀는 무엇을 꿈꾸는가>라는 두 편의 운문극을 포함시키며 '안락의자에서 보는 연극'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이를 통해 극작의 방향을 잡은 그는, 이후 '세계평론지'에 상연을 고려하지 않은 다수의 희곡을 발표했다. 1833년 Andrea del Sarto|앙드레아 델 사르토it를 시작으로 Les Caprices de Marianne|마리안의 변덕프랑스어, 1834년 Fantasio|판타지오프랑스어, 사랑을 장난으로 하지 말아라( On ne Badine pas avec l' Amour프랑스어 ), Lorenzaccio|로렌자초프랑스어, <종마(種馬)>, 1837년 Un Caprice|바람기프랑스어 등이 대표적이며, 이 작품들은 이후 극작집 <희극과 격언극>에 수록되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상연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더욱 자유로운 형식과 풍부한 시적 감성을 담아낼 수 있었다. 또한 마리보 풍의 정교한 심리 묘사를 계승하여 프랑스 연극의 전통을 확장하고 깊이를 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역사극 <로렌자초>는 셰익스피어 연극을 연상시키는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문체를 갖춘 낭만주의 희곡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과 <사랑을 장난으로 하지 말아라>는 현재까지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2]
뮈세 희곡의 진가는 뒤늦게 인정받았다. 1846년 여배우 알랭이 <바람기>를 성공적으로 상연하면서 그의 작품들은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이후 여러 작품이 무대에 올라 각광받았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 자크 코포가 연극에서 시적인 요소를 회복하려는 운동을 펼친 이후에야 비로소 뮈세 희곡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이루어졌다고 평가된다.
5. 3. 소설
- `한 세기의 아이의 고백` (La Confession d'un enfant du siècle프랑스어, 1836)[20][21]: 조르주 상드와의 연애 경험 등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 소설로 평가받는다.
- `두 명의 애인` (Les Deux Maîtresses프랑스어): 중편 소설집이다.
- `프레데릭과 베르누렛` (Frédéric et Bernerette프랑스어)
- `미인점` (La Mouche프랑스어, 1888)
- `마르고` (Margot프랑스어)
- `미미 팡송` (Mimi Pinson프랑스어)
- `흰 멧새 이야기` (Histoire d'un merle blanc프랑스어)
- `가미아니` (Gamiani프랑스어): 작자 미상으로 알려져 있으나 뮈세의 작품으로 추정되기도 하는 에로티카 소설이다.
5. 4. 단편 소설 및 중편 소설
- La Confession d'un enfant du siècle|세기아의 고백프랑스어 (1836)[20][21]
- Les Deux Maîtresses|두 명의 애인프랑스어 (1837)
- Frédéric et Bernerette|프레데릭과 베르누렛프랑스어 (1838)
- Margot|마르고프랑스어 (1841)
- Histoire d'un merle blanc|흰 멧새 이야기프랑스어 (1842)
- Mimi Pinson|미미 팡송프랑스어 (1845)
- La Mouche|점프랑스어 (1853)
- Gamiani, ou Deux nuits d'excès|가미아니프랑스어 (1833년 추정, 익명 출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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